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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강화도

약암홍염천 관광호텔 주변 관광지를 소개합니다.

참성단은 단군이 민족의 영화와 발전을 위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며 거친돌을 다듬어 상단은 하늘을 나타내는 원모양을, 하단은 땅을 나타내는 사각형으로 천원지방 사상을 보이고 있다. 매년 전국체전 때가 되면 참성단에서 강화 칠선녀에 의해 채화된 성화가 불을 밝힌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으로 탁자식 고인돌이다. 덮개돌의 길이가 약6.4m, 폭이 5.2m이며 그 밑으로 2개의 굄돌과 2개의 막음돌이 받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개의 막음돌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덮개돌의 무게는 약75톤정도 나간다고 하는데 이 돌을 얹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른 50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고려때 강화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였으며 조선 인조22년(1644년) 강화의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되었다. 또한 고종3년(1866년) 9월 7일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쳐들어온 곳으로 이곳이 바로 강화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광해군이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고 효종9년(1658년)에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이다. 1871년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으로 요구하면서 아세아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하자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싸웠다.

덕진진은 원래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조선 효종7년(1656)에 축조된 것이다.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 된 덕진돈대, 남장포대, 덕진포대가 이 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포격전이 치러졌던 곳이다.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7년(1656)애 구축한 요새이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군함 운양호침공 등 근세외침에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영하였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 간의 궁궐 터다.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고, 외규장각이 복원되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 제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潛邸)이다. 서울에 있는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으로 지어 질박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碑閣)이 있다. 지붕 옆면이 팔(八)자 모양이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 때 쌓은 성으로 이때는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 중에서 내성이 강화산성이다. 강화산성은 약7km로 성문은 동서남북 4개, 암문 4개, 수문이 2개 있다.

이 정자는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라 하였으며 정묘효란 때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곳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불심(佛心)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서 만들어졌다. 팔만대장경은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가지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개 법문을 실었다. 선원사는 1234년 당시 무신집권의 수장이던 최우가 강화도에 세운 호국사찰로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산성은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병인양요 때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양헌수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 불상은 두꺼운 판석 위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입상이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불상으로 모든 면에서 단순화, 생략화 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살찐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종은 강화산성의 성문을 열고 닫음을 알리기 위하여 조선 숙종 때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유수 '민진원'때에 정족산성에서 재주조한 종이다.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이 약탈하려 하였으나 너무 무거워 중도에서 포기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이 읍성은 조선 이조 때 축성한 것으로 둘레 430m, 높이 약6m로 동, 남, 북3곳에 성문을 설치했다.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복루라 하였다 한다. 남문인 유량루는 무너지고 홍예만 남아있다.

1890년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읍 갑곳리에서 회당 겸 사택을 매수하고 이곳에서 전돌르 시작하였다. 1900년 현재의 한식 건물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고 했던 것을 고려 충렬왕 때, 정회궁주가 옥등을 이 절에 바친 후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전등사는 외침이 있을 때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국방의 임무도 담당했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지정문화재 17점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5년 회정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보문사는 석모도에 위치하는 사찰로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며, 한국의 3대 관음성지 중 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불상을 모신 석실과 마애석불이 있으며 석실은 천연동굴로 23개 감실에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